시조 안렴사공 사적 公(공)의 성은 金(김)이요, 諱(휘)는 忠(충)이며 자는 士誠(사성)이라. 중국 당나라 여남(汝南; 河南省 鳳陽府,하남성 봉양부) 사람이었다. 당나라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형주자사에 이르렀다. 당나라 현종이 공의 높은 덕망을 인정하고 按廉使(안렴사)를 제수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냈더니 돌아올 때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신라 유린땅(영덕 축산포)에 표박하였다. 이때 신라 경덕왕이 이 사실을 당나라에 알린 바 당나라 황제(註:唐玄宗으로 安祿山의 亂을 피하여 蜀에 피신중이었음)가 조서를 내려 이르되 십생구사한 신하를 신하의 예의로 부를 수 없으니 그가 원하는 데로 편하게 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덕왕이 이 조서를 공에게 보이고 물으니 공이 눈물지으며 말하기를 넓은 하늘아래 임금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의 끝까지 임금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으니 원컨대 신라에 살겠다고 하였다. 경덕왕이 공의 표박을 애처롭게 여기고 영의공에 봉작하고 英陽(영양)에 살도록 한 뒤 식읍으로 삼아주었다. 경덕왕이 공을 불러 말하되 그대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성을 내려야 하며 군이 여남에서 왔으니 南(남)자로 성을 삼으라. 또 君(군)의 온화한 거동을 보고 민첩한 언어를 들어보니 모두가 법다우니 이름을 敏(민)자로 하라 하였다. 이에 공의 성은 남씨로 이름은 민으로 자는 여정으로 고치고 영양으로 관향을 삼으니 英陽南氏(영양남씨)가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공이 사신갈 때 대동한 맏아들 錫中(석중)은 본성 김씨성을 이어 받아 관향을 英陽(영양)으로 하여 金氏(김씨)의 대를 지켰다. 공이 안렴사로 일본에 간 때는 당나라 玄宗天寶(현종천보) 14년 (을미, 755년)이었다. 공이 당예종 태극원년(712년) 임자 10월 1일 출생하여 당덕종 건중 3년(782)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였으며, 묘는 英陽郡 英陽邑 東部洞(영양군 영양읍 동부동) 日月山(일월산) 남록 자좌에 있다. 공이 나면서 영특한 자질이 있어 천지일월을 알고 천지일월의 尊卑往來 (존비왕래)를 운했다. 공의 풍모를 보면, 양 귀의 길이가 세치를 넘었으며 눈동자는 겹줄을 이뤄 뚜렷했고 붉은 수염이 아홉치에 이르렀으며 신장 또한 아홉자나 되었다고 한다. 공이 당나라에 있어서는 곽자의(郭子儀 : 당나라 숙종 덕종때의 공신이며 부귀공명을 구비한 사람), 안과경(顔果卿 : 안록산의 난에 절의를 지킨 명신)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신라에 와서는 서문언, 채익길과 더불어 우의가 두터웠다. 안과경이 안록산의 난에 순절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눈물로 글을 지어 당나라를 향하여 제사를 지냈다. 공의 配位(배위, 배우자)는 당나라 張九鈴(장구령)의 女息(여식)으로 당중종 경용3년(무신, 708년)에 출생하여 현종천보10년 (신묘, 751년) 1월 1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44세라. 뒤를 이은 배위는 신라 군윤 김원의 女息(여식)이며 두아들 수와 鏶(집)을 낳아 영양남씨(英陽南氏)의 대를 이었다. 국립도서관 장서의 안렴사공 고증 문헌: ■ 增補 文獻備考券之四十六 補 帝係考七 附氏族 (증보 문헌비고권지46 보 제계고7 부씨족) 景德王十四年唐朝按廉使金忠奉使日本 漂泊丑山岳王以其從南來賜姓名南敏 (경덕왕14년당조안렴사김충봉사일본 표박축산악왕이기종남래사성명남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