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陽金氏와 英陽南氏의 기원(한반도 정착 유래)  

  • 지금부터 1천2백여년 전인 서기755년 신라 경덕왕14년(乙未)에 唐(당) 河南省(하남성) 鳳陽府(봉양부) 汝南(여남)에서 荊州刺史(형주자사)를 지내신 金忠 (김충, 現 중국 汝南金氏)께서 按廉使(안렴사,순방사절)되어 일본으로 가셨다가 돌아 오시던 길에 해상에서 태풍을 만나 신라 有隣地(유린지) 즉, 지금의 영덕군 丑山面(축산면) 竹島(죽도)에 漂迫(표박)하시게 되었다. (하단 고증문헌 참조)


  • 경덕왕이 이 사실을 唐(당) 天子(천자)에게 알리니 天子(천자)가 詔書(조서)로 이르기를 "十生九死(십생구사)한 신하를 내가 손짓하여 부르는 것은 신하에 대한 예가 아니니 그분의 所願(소원)에 따르라" 하였다.

  • 경덕왕이 공의 漂迫(표박)함을 哀惜(애석)하게 여기고 謚號(시호)를 英毅公(영의공)으로 하고 英陽君(영양군)에 封(봉)하여 그 고을을 食邑地(식읍지)로 下賜(하사)하니 이로부터 英陽金氏(영양김씨)가 이 땅에 터잡게 되었다.

  • 그 후 경덕왕이 公(공)을 불러 이르되 君(군)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으니 賜姓(사성)을 함이 마땅하리라. 君(군)이 汝南(여남)에서 왔으니 南字(남자)로 姓(성)을 하고 또한 君(군)의 거동을 살피고 언행을 들으니 敏捷(민첩)하고 화용(和容)함이 가히 法(법)다운지라 이름을 敏(민)으로 하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姓(성)을 南字(남자)로 하고 이름을 敏(민)으로 고치니 英陽南氏(영양남씨)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처음 공이 使臣(사신)으로 가실 때에 長子(장자)를 帶同(대동)하셨으니 즉 *僕射公(복야공) 휘(諱) 석중(錫中)이시다. 僕射公(복야공)은 賜姓(사성) 전 중국 부인 (張九鈴 女息)에게서 나셨으니 본성 金씨를 지켜 英陽金氏 (영양김씨)가 되고, 賜姓(사성)후에 신라 부인(신라군윤 김원의 女息)에게서 출생한 子孫(자손)은 賜姓(사성)을 遵守(준수)하여 英陽南氏 (영양남씨, 의령남씨 고성남씨로 분파)가 되었다.

  • 金.南(김남) 兩氏(양씨)는 姓字(성자)는 비록 달리 하나 그 始祖(시조)는 같은 英毅公(영의공)이시며, 公(공)은 一身(일신)으로 兩姓(양성)의 시조가 되셨으니 그 후손은 다 같이 깊은 感懷(감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주1 : 僕射(복야)는 진(秦)나라때 처음 둔 벼슬로 본시 활쏘는 일을 맡았으나 당(唐)나라 이후에는상서(尙書)의 다음 벼슬로 되어 실권(實權)을 장악하였으므로 사실상의 재상(宰相)이었음.


    국립도서관 장서의 안렴사공 고증 문헌:

    ■ 增補 文獻備考券之四十六 補 帝係考七 附氏族
    (증보 문헌비고권지46 보 제계고7 부씨족)
    景德王十四年唐朝按廉使金忠奉使日本
    漂泊丑山岳王以其從南來賜姓名南敏
    (경덕왕14년당조안렴사김충봉사일본
    표박축산악왕이기종남래사성명남민)

    ■ 文獻通考羅朝六諡臣四公二侯
    (문헌통고신라조6시신4공2후)
    英毅公英陽君南敏 文忠公角干金大忠 憲忠公金身 忠節公吏部尙書林八及 弘儒侯翰林薛聰 文昌侯內吏侍郞崔致遠
    (영의공영양군남민 문충공각간김대충 헌충공김신 충절공이부상서임팔급 홍유후한임설총 문창후내이시랑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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