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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현 退溪(퇴계)를 길러내신 영양김씨 여식
영양김씨 11世 金有庸(김유용, 副司直)의 맏딸이 진성이씨 집안 李繼陽에 출가하여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읜 손자 李滉(이황, 호 퇴계)에게 정성을 쏟아 대 성현으로 키우시고 
不遷之位 (불천지위)의 성은을 입으셨으니 이는 우리 영양김씨 가문에도 큰 긍지요 자랑입니다.
이에 퇴계선생의 가계도와 관련 문헌을 입수하여 후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 진성인 퇴계 이황의 가계도
            ◈ 정부인 영양김씨 묘갈지
            ◈ 부군 자헌대부이조판서 계양 사적


묘소와 영정보기
■ 眞城李氏(진성이씨) 퇴계 이황의 가계도
子 李繼陽(이계양) 眞城李氏, 進士 贈資憲吏曹判書 享洛川書院, 配 英陽金氏 父 有庸, 副司直
                 (진성이씨, 진사 증자헌이조판서 향락천서원, 배 영양김씨 부 유용, 부사직)
              ※ 진성이씨 온혜공파세보의 해당부문을 여기를 클릭하면 볼 수있습니다.

         子 李埴(이식) 進士贈榮政議政府左贊成 享淸溪書院
                      (진사증영정의정부좌찬성 향청계서원)
                    子 李潛(이잠)
                    子 李河(이하) 訓道(훈도)
                    子 李의(이의)
                    子 李瀣(이해) 文科贈吏曹判書謚貞愍 號溫溪 享淸溪書院
                                 (문과증이조판서익정민 호온계 향청계서원)
                    子 李澄(이징) 찰방
                    子  李滉(이황) 崇政左贊成贈崇祿令議政 號退溪 諡文純 享陶山書院
                                                (숭정좌찬성증숭록령의정 호퇴계 시문순 향도산서원)

          子 李우(이우) 文科嘉善戶曹參判 號松齎 享淸溪書院
                        (문과가선호조참판 호송재 향청계서원)
                    子 李壽령(이수령) 찰방
                              子 李憑(이빙)
                              子 李潔(이결)
                              女 鄭經世(정경세) 判書 號 愚伏(판서 호 우복)
                              女 宋浚吉(송준길) 號 同春(호 동춘)


묘소보기, 묘소약도
■ 貞夫人英陽金氏墓碣識(정부인영양김씨묘갈지)
                                    (진성이씨 온혜종파 세보 宗史篇)

夫人金氏 系出英陽 曾祖諱道生 珍島郡守 祖諱智老 信川府使
考諱有庸 別侍衛副司直 女+北永川李氏 義興懸監諱坡女 
以宣德庚戌十月四日生 有厚德 中誠純懇 事先祖 贈判書公諱繼陽 
創基業 成門戶 子孫蕃衍 季子우 榮養數十年 夫人執德有恒 
不以富貴移習子孫 諸婦女 一無間言 諸孫進見 必以勤學立揚爲勸 
廢業虧行爲戒 童顔鶴髮 壽考康寧壬午九月十八日終 享年九十三 
葬先祖墓後負壬原
                                  孫 滉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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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인영양김씨묘갈지

  부인김씨의 본관은 英陽(영양)이니 증조부 휘 道生은 진도군수요.
조부 휘 지로는 신천부사요. 부친 휘 有庸은 별시위 부사직을 지냈고,
비(어머니)는 영천이씨 의흥현감 휘 坡의 따님이니 宣德(명나라宣宗의 년호) 
경술(1430년 세종12년)10월 4일에 나셨다. 
  천성이 후덕하고 정성스럽고 순수하여 간곡한 마음으로 증판서공
휘 繼陽을 섬겨서 창업기반을 세우고 문호를 이루었다. 자손들이 
번성하였고 계자 우는 수십년 동안 좋은 의복과 음식을 봉양했다.
  부인은 부덕을 가지심에 떳떳한 법도가 있어 부귀의 습관에 
마음을 옮기지 않았으므로 자손의 부녀들 사이에는 조금도 간언하는
일이 없었다. 여러 자손들이 나아가 뵈올때면 반드시 부지런히 
공부하여 입신양명할 것을 권하고, 학업을 폐하고 행실을 그르치는
것을 경계하셨다. 
  동안학발로 천수를 마치시고 임오년(1522년) 9월 18일 향년 93세에
돌아가셨다. 묘소는 선조고 산소뒤 임좌에 안장했다.
                                  손자 황 삼가지음


묘소보기, 묘소약도
■ 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行成均館進士諱繼陽事蹟
  (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행성균관진사휘계양사적)
                                                (진성이씨  온혜종파 세보 宗史篇)

  공은 영양김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김씨집은 예안현 서쪽에 살았다. 공은 처음에 
예안현 동쪽인 부라촌(지금의 부포)에 살았는데 공이 봉화현 교도가 되어 하루는 
봉화에 가는 도중 溫溪를 지나 가다가 그 泉石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배회하면서 
두루 살펴보다가 新羅峴에서 잠시 쉬어 가려는 차에 우연히 한 중을 만났으니 그 
중도 역시 온계에서 오는 길이었다. 

  중과 함께 쉬었는데 온계의 풍수가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니 공은 공의 소견과 
일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 중을 데리고 온계로 돌아가서 오르락 내리락하며 두루 
살펴보았다. 중이 집터 한곳을 지적하며 여기에 살면 귀한 아들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공은 그말을 듣고 마음으로 옮겨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 때는 단지 민가 한집이 
살고 있을 뿐 밭 사이사이는 모두 묵어 있어서 곳곳마다 개간하여 농사 지을 수 
있었다. 또 숲이 우거지고 골이 깊고 아늑하여 시냇물이 맑고 따라서 물고기도 많이 
서식하고 또 냇물을 끌어 들여 밭과 논에 물 을 댈 수도 있었다.

  공은 성품이 恬靜(염정)하고 원대하여 관로 진출에 힘쓰지 않고 조용히 농사짓고 
때로는 낚시질로 낙을 삼으면서 자손 교육을 필생 사업으로 하다가 세상을 마치실 
뜻이었다.

  공의 피부와 안색은 백옥같아서 속세를 벗어난 풍채이었다. 공의 형 訓練參軍이 
일찌기 매와 개 기르기를 좋아하므로 근심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일은 儒家의 근본 
뜻을 저버려 그르치는  것이니 이 어찌 子侄들에게 보일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先君과 숙부 松齋公이 젊었을때 龍頭山에 있는 龍壽寺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공이
그때 시 한수를 지어 보냈는데 '사시절후는 빨라서 어느덧 해는 저무는데 깊은 산 
절문 앞에는 백설이 쌓였으리라. 이 차가운 절간에서 고생하며 공부하는 너희들 
생각하니 꿈속에서 때때로  너희 곁을 찾아간다'

  공은 혹시 자제들이 비복들을 꾸짖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경계하여 말씀하기를
'너희들이 남의 하인이 되어 남에게 복종하여 섬긴다면 일상생활에 과실이 없겠느냐?
무식한 비복들이란 마땅히 인정을 베풀어 용서하여야 하는데 어찌 가혹하게 힐책을 
하느냐'고 하셨다.

  부인 김씨는 世宗庚戌10월4일에 나셨고 타고난 성품이 후덕하고 순수하며 간곡한
정성으로 선고조를 섬기셨고 가시덤불을 헤치고 기틀을 닦을 때 근검으로서 내조를
닦았고 자애와 은혜로서 비복과 자제를 길러서 먼 후일을 생각하며 門戶를 경영하여
이루었으니 오늘에 이르러 자손들이 번성하게 된것이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우리 선군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숙부 참판공이 조정에 수십년 동안 계시면서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숙모 이씨도 단정하고 한결같이 공경하여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부인께서는 확고한 婦德으로 시종일관 추호라도 호화롭고 교사한 빛이 없었다. 
자손의 여러 부녀들이 서로 조금도 간언이 없었다. 여러 자손들이 나아가서 뵈올 때면
반드시 부지런히 공부하여 입신양명을 권장하셨고 공부에 소홀하여 행실에 결함이 
있을까 경계하셨다. 童顔白髮로 천수를 누리시다가 돌아가시니 향년이 93세이었다. 
장지는 수곡 조고와 동원에 모셨다.

                                               손자 판중추부사 황(滉) 삼가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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