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랑아범註: 아래 글은 영양남씨 남재권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영양남씨(英陽南氏)


(이 글은 계유대동보(癸酉大同譜, 1993)를 기초로 했다 - 남재권)

목차

  1. 남씨의 족보
    1. 제 족보
    2. 남씨 족보의 기원과 발전

  2. 남씨의 기원
    1. 시조
    2. 기원

  3. 발전
    1. 영양파
    2. 안동파, 의령파, 고성파

  4. 맺음말

  5. 참고 문헌


  1. 남씨(南氏)의 족보(族譜)

    1. 제(諸) 족보(각 지파(支派)의 족보라든지 개인의 집에서 내려오는 가첩(家牒)은 생략함)

      남씨의 족보가 제일 처음 체계화된 것은 남사고(南師古, 1509-1571)에 의해서라 한다. 전 종인(宗人)을 대상으로 한 족보를 체계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최초의 노력은 문헌상으로는 안동 임진보(壬辰譜) 서문에 최초로 나타난다. 이 임진보 서문에는 1622년 융달(隆達)이 편찬한 안동 임술보(壬戌譜) 서문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 있는데 여기서 융달은 "서울에 사는 전에 현령을 지낸적이 있는 대현(大俔)은 의령의 후손인데 여러해 동안 족보간행의 일을 하여 처음으로 족보를 이룩하여(始得基槪譜成) 담양(潭陽) 문중에서 간행하려하다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의령은 본래 영양과 한 파인데 이제 영양파가 빠지면 이는 족보가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하고 이에 영양보(英陽譜)를 구하여서 그 근원을 밝히고자 하여 천리(千里) 길을 멀다하지 않고 나에게 와서 부탁하니 내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않으리오. 이에 거황(居煌), 군태(君太)와 함께 널리 세보(世譜)를 구하고 고적(古跡)을 고증하고 모든 비문(碑文)과 지문(誌文)을 문중 어른에게 물어 세대와 파를 바른 연후에 몇 권을 간행한다....." 라고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1622년을 전후해서 의령파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족보를 만들려고 시도했음을 볼 수 있으며 안동파에는 아직 일반적인 족보가 없었을을 알 수 있다.

      각 파별로 살펴보면

      • 영양관(英陽貫) 대광공파(大匡公派, 이 글에서는 영양파라 약(略)함)와 밀직공파(密直公派, 이 글에서는 안동파 약함)

        1. 이곳은 원래 남씨의 기원이 되는 곳이므로 고대로 전해내려 오는 가첩(家牒)과 사소가 편찬한 족보가 산재해 있었을 것이다. 1712년 안동 임진보(壬辰譜)에 보면 1622년 안동의 융달(隆達)이 최초로 남씨의 족보를 체계화 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그의 아들 '石+慈' 도 1680년에 자신이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는 글을 쓴 것이 나온다.

        2. 임진보(壬辰譜): 1712년 발행, 안동파가 독자적으로 안동파만을 수록하여 발행, 안동파 최초의 체계적인 족보
        3. 정미보(丁未譜): 1727년 발행, 영양파가 독자적으로 영양파만을 수록하여 발행, 영양파 최초의 체계적인 족보
        4. 을유보(乙庾譜): 1765년 발행, 안동파가 독자적으로 안동파만을 수록하여 발행
        5. 경오보(庚午譜): 1810년 발행, 영양파와 안동파가 최초로 합본하여 발행.
        6. 경인보(庚寅譜): 1890년 발행
        7. 갑술보(甲戌譜): 1934년 발행


      • 의령관 밀직공파(宜寧貫 密直公派, 이후 의령파라 약함)

        1. 원래 신구이보(新舊二譜)가 있었으나 연대가 멀고 기재 사항이 심히 간략하여 선(銑)이 모아 수정했으나 이 또한 미비하고 빠짐이 많았다 한다.
        2. 계유보(癸庾譜): 1693년 발행, 의령파 최초의 체계적인 족보
        3. 무인보(戊寅譜): 1758년 발행
        4. 갑자보(甲子譜): 1804년 발행
        5. 경오보(庚午譜): 1870년 발행
        6. 경자보(庚子譜): 1900년 발행
        7. 병인보(丙寅譜): 1926년 발행


      • 고성관 고성군파(固城貫 固城君派, 이후 고성파라 약함)

        1. 신미보(辰未譜): 1751년 최초의 체계적인 고성파 족보 발행
        2. 임진보(壬辰譜): 1772년 발행
        3. 병진보(丙辰譜): 1856년 발행
        4. 병진보(丙辰譜): 1916년 발행


      • 남씨 대동보(大同譜)

        1. 정유보(丁酉譜): 1957년 남씨 최초의 영양, 안동, 의령, 고성 3파의 대동보
        2. 기미보(巳未譜): 1979년 발행
        3. 계유보(癸酉譜): 1993년 발행(이후 이 글에서 계유보는 이것을 말한다)


    2. 남씨 족보의 기원과 발전

      남씨의 모든 족보의 기원은 남사고(1509-1571)로부터 비롯되는 것같다. 계유보 수권 425쪽에 보면

      英陽宗人 蔚平譜
      
      居 蔚珍 平海 故云.
      譜中 云稱 南師古 古譜 似 此譜.
      宜寧 南尙致 家譜云 舊譜 格菴 師古 所撰 而沒 基全書    
      
      이라는 글이 나오는데 풀이하면
      영양 종인 울평보 (이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과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울진 평해 사람이므로 (이 족보를) 이렇게 (울평보라) 부른다. 이 족보에는 "남 사고 고보" 라는 말이 나오는대 이 족보와 비슷하다. 의령 남상치의 가보에는 "구보는 격암 남사고가 (편)찬한 것인데 지금은 그 전부가 없어졌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울진, 평해 지방의 족보는 남사고 족보를 그 기원으로 삼았음을 볼 수 있고 의령파에서 말하고 있는 선이 정리했다는 구보는 사고의 족보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고는 울진 사람이지만 중앙에서 활동을 했고 그 당시의 대유였으므로 의령파도 사고의 족보를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령파에서 말하는 신보도 자연히 구보를 기초로 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즉 남씨의 족보의 기원은 사고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사고는 족보를 만드기에 적합한 여건에 있었을 것이다. 영양파의 시조인 홍보 이래로 사고의 조상은 대대로 울진에 살았으므로 사고는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문중의 노인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들었을 것이고 문헌과 비석 등을 직접 고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울진은 영양과 축산과도 가깝기 때문에 태초에 남씨의 기원에 대해서도 그 전승이 어렴풋이나마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족보는 숙종(재위: 1675-1720)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양, 안동, 의령, 고성 중에서 그 당시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던 의령이 안동 임진보가 나오기 20년 전에 전 의령파 종인의 족보를 만들었고 이후에도 가장 활발한 족보편찬을 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안동도 유림이 많으므로 곧장 족보편찬에 들어갔을 것이고 영양인은 주로 영양, 울진, 청송 등의 산골에 사므로 족보편찬이 의령보다는 30여년, 안동보다는 15년 정도 늦어졌으며 이후도 그렇게 활발함을 보이지는 않는다. 고성은 수가 너무 적으므로 족보편찬이 활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남씨의 족보사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족보의 단일화에 대한 열망과 그 좌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남씨의 영양, 안동, 의령, 고성 모두가 자신들이 원래는 한 조상의 자손이라는 데에 있어서는 일치를 하고있으나 윗대 조상들의 계보가 어떠한가에 대해서 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안동파와 의령파간의 계보문제이다. 안동파도 자신들의 시조(始祖)가 군보(君甫)라 하고 있고 군보이하 자신들 조상의 계보를 갖고 있으며 의령파도 자신들의 시조가 군보라 하며 안동파와는 전혀 다른 자신들의 계보를 갖고 있다. 영양, 안동, 의령, 고성의 제파가 단일한 족보를 만드려는 노력은 1622 경 첫 족보를 만드고자 할 때부터 시도되었으나 번번히 좌절되다가 1957년 정유대동보(丁酉大同譜)에서야 의령 상철(相喆)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비로서 그 결실을 보게되었다. 영양과 안동은 1810년 경오보(庚午譜)때부터 합보(合譜)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양과 안동이 이렇게 먼저 합보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영양과 안동은 그 조상들에 있어서 곂치는 부분이 전혀 없기 때문이고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유대동보에서의 해결방법은 영양파의 시조 홍보(洪輔), 안동파와 의령파의 시조 군보(君甫) 그리고 고성파의 시조 광보(匡甫)를 시조 남민의 1세로 하고 영양파와 고성파는 다른 파들과 곂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족보를 홍보와 광보 밑에 그대로 붙이고 안동파와 의령파는 각 파에서 주장하는 군보의 아들을 형제로 해서 그들 고유의 족보를 그 밑에 붙이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가장 합리적이고 타협적인 방안이었지만 1957년 당시의 고루한 종인(宗人) 노인들이 심히 반대를 해서 종인들 간에 불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1979년 기미대동보 서문에는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북한에 살고있는 동족과 합보(合譜)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는 말이 나온다.



  2. 남씨의 기원

    1. 시조

      지금 남씨 3관4파는 모두 시조의 기원을 남민(南敏)으로 하고 있고 그의 중국도래설을 정설로 인정한다. 중국도래설이란 755년(신라 경덕왕 14년)에 당나라 사신 김충(金忠)이 일본에서 돌아가는 길에 폭풍을 만나 영양 축산 죽도에 표착하였는데 그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난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여서 김충은 당 천자에게 신라에 살게 해주기를 청했고 천자가 허락을 하자 경덕왕이 김충에게 영양을 식읍(食邑)로 주고 성을 남이라 하사하고 이름을 민이라 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기원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는 아니하나 추측하건데 사고가 처음 족보를 만들면서 이것을 확립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남씨 족보가 처음 체계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사고 때라 보면 사고의 출생년도가 1509년이므로 김충의 축산 죽도 상륙에서부터 이때까지 750 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과연 750년 동안 남민의 이야기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을까? 계유보 수권(首券) 176 쪽 몽뢰 가첩(夢賚 家牒)에 있는 의령 후손 연년(延年)의 글에 보면 중국도래설은 사고의 가설이라 말하고 있다. 몽뢰 가첩은 필자에게 자료가 없어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1622년 이전에 만들어진 남씨 최고(最古)의 족보중의 하나이다. 같은 책 177쪽 병암(屛巖)의 글에 보면 중국도래설이 실증적으로 고증해서도 신빙성 없음을 말하고 있다. 시조 남민이 중국에서 왔고 본명이 김충이다는 것도 서로 모순이다. 김씨는 신라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나라 고유의 성씨로서 다른 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행랑아범註: 이 대목은 필자 남재권씨의 중국성씨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보인다. 지난 2007년 4월 중국의 여남김씨 진중쩌우(金鐘照 50세.하남성 여남현 정치협상회부주석)씨가 한반도에 정착한 조상 金忠을 찾아 한국에 온 사실이 있슴. 기사참조 )
      남민이 최초로 살았다는 곳이 축산(丑山)이라 하고 축산에는 남민과 그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김이부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아직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한반도에 도착해서 남민이 남민 당대에 영양을 식읍으로 받았다면 과연 그가 영양현으로 가지 않고 바다가의 조그만한 어촌에 계속 머물러 있었겠는가?

      이 이야기는 전부가 강한 유교적인 색깔을 띄고 있다. 김충이 중국사람이라는데서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볼 수있고 왕으로부터 직접 성을 하사받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쳤다는데서 권위주의적 유교 정신을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사고같은 유학자가 생각할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일 뿐더러 조선시대 유학자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사고는 김씨라는 성이 우리 나라 고유의 성이며 그 당시 신라와 중국의 관직명, 사신의 왕래 등에 대한 실증적인 고증은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남씨의 시조는 원래 영양 김씨였는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이 근거로는 지금도 우리 남씨는 영양 김씨와 결혼을 금하고 있는데 이는 남씨와 영양 김씨가 한 핏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유보 수권 54 쪽에 나와있는 남민이 처음 살았다는 동네를 사람들이 김이부동이라는 부르는 것도 남씨가 원래 김씨였음을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고가 아무 근거없이 어느날 갑자기 우리 남씨는 김씨로부터 나왔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그 당시 사람들이 사고의 말을 수용했다는 것으로 봐서도 남씨가 김씨에서 나왔다는 것을 뒤받침한다 하겠다. 우리 남씨는 아마 고려시대에 성을 김씨에서 남씨로 바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김씨는 귀족의 성이었으므로 김씨가 평민의 성인 남씨로 바꾸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2. 기원

      현재 남씨 각 파별로의 시조는 영양파는 홍보(洪補), 안동파와 의령파는 군보(君甫), 고성파는 광보(匡甫)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로 판단할 때 홍보, 군보, 광보의 삼형제설은 근거가 없다. 이름의 끝자의 발음이 일치하고 한자도 비슷한데서 형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객관적인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1425년에 죽은 광보의 6세손 영번(永蕃)이 60살 정도 살았다면 그의 출생년도는 1360년 경이고 그의 아버지 승고(承顧)가 30살 되던 해에 영번을 낳았다면 승고는 1330년경에 출생한 것이되다. 광보는 승고의 5대조 할아버지이다. 계유보 수권 433쪽에 있는 1372년(공민왕 21년)에 만들어진 휘주(暉珠) 묘의 광기(壙記)와 437쪽에 있는 1390년(공양왕 2년)의 호적에 의하면 군보는 휘주의 5대조 할아버지이다. 휘주가 60살 정도 살았다고 하면 휘주는 1310년경에 출생한 것이 된다. 이로 볼 때 광보와 군보는 같은 시기의 사람이거나 이들 사이에는 많아야 1세대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이들의 출생년도는 1150년 내외가 될것이다. 같은 책 412쪽 의령 후손 태보(泰譜)가 쓴 글을 보면 백운 이 규보(白雲 李奎報, 1168-1241)의 친구 중에 고성이 본인 남씨 친구가 있었다는 것으로 봐서 1200년 경에 이미 고성파가 성립했음을 알 수 있다. 고성파가 가장 나중에 형성된 것은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 바이므로 이로볼 때 1200년 이전에 이미 영양파, 안동파, 의령파가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남씨의 실제적인 기원은 최소한 1200 이전에 잡아야 한다. 과거의 종인들 중에서 홍보, 군조, 광보의 관직명칭이 충선왕(1308-1313) 이후에 만들어진 관직이므로 이들이 충선왕 이후에 관직을 했던 사람이라 주장하는데 이것은 제고를 해보아야 할 것같다. 만약 이러하다면 충선왕은 1308년에 왕에 오르는데 되었는데 군보의 5대손인 휘주가 1372년 죽고 광보의 6대손 영번이 1425년에 죽은 사실을 설명하기 힘든다. 안기부가 정보부로 명칭이 바뀌고 이후 기능상의 큰 변화없이 계속 존속하여 50년 정도가 지났을 때 어떤 사람의 할아버지가 안기부장을 했으면 그 손자는 그의 할아버지가 안기부장을 했다고 말할것인가 정보부장을 했다고 말할 것인가?




  3. 발전

    1. 영양파

      남씨는 영양에서 지방호족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초기 조상들의 묘지는 울진(蔚珍)이 주류룰 이루고 부인(婦人)들의 성씨를 살펴보면 울진 장씨, 울진 임씨, 강릉 최씨 등 울진 지역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고이 남씨의 본을 울진이라 하지 않고 영양이라 한 것은 족보에 나와 있는 조상 이전에는 남씨들이 영양에 주로 살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영양에 시작한 우리 조상들은 홍보 훨씬 이전에 울진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시조 홍보로부터 5세 혁과 삼기까지 초기 조상들을 살펴보면

      1세: 시조 홍보(洪輔)

      홍보의 관직은 족보에서 공식적으로는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상의도 감사(重大匡 都簽議 贊成事 商議都 監事)라 내세우지만 문헌상으로는 군기 주부 동정(軍器 主簿 同正)이라 한다. 중대광이란 고려 후기 종1품(從一品)의 계급을 말한다. 군기(軍器)란 군기시(軍器寺)의 줄임말이며 군기(軍器)를 담당하는 부서이고 주부(主簿)란 종7품 내지 정8품의 관직을 말한다.

      2세: 겸(謙)

      겸의 관직은 위위 주부령 동정(衛尉 主簿令 同正)이니 위위는 의장(儀裝)을 담당하는 관청을 말한다.

      3세: 숙손(淑孫)

      숙손의 관직은 급제 검교 예빈시 경(及第 檢校 禮賓寺 卿)이니 급제란 과거에 합격했다는 말이고 예빈시란 손님을 맞이하는 중앙관청이며 지금의 의전실과 같고 경이란 예빈시의 장을 의미하며 예빈경은 종3품이다. 검교란 말은 이 관직에 있는 사람은 임시직 혹은 명예직으로 이 명칭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다. 그러므로 숙손은 실제로는 예빈경보다 낮은 관직을 했었으나 명예직으로 이 명칭을 받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4세: 지탁(之卓)

      지탁은 급제(及第)이다.

      5세: 혁( ), 삼기(三起)

      혁의 관직은 진사 검교 예빈경(進士 檢校 禮賓卿)인데 진사란 과거의 진사시까지 합격한 자를 말한다. 삼기는 진사이다.

      홍보의 관직은 중대광이 아니라 군기 주부일 것이다. 이 이유로는 첫째 울진 장씨(蔚珍 張氏) 집의 족보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이 기록외에는 달리 홍보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관직이 부풀려지면 부풀려졌지 절대 축소되지 않는 것이 족보의 철칙(鐵則)이다. 사고가 족보를 처음 만드면서 자신의 조상을 하나 하나 거슬러 올라갔을 것인데 그가 찾아낸 문헌상 최초의 인물이 바로 울진 장씨 족보에서 발견한 홍보일 것이다. 홍보가 문헌상 확인된 남씨 최초의 사람이므로 홍보가 영양파 남씨의 시조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고는 남씨의 조상이 홍보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 자연의 이치이므로 전해내려오는 구전을 첨삭하여 남민을 등장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이던 아니면 사고 이후의 사람이든 곤란에 빠지게 된다. 홍보가 문헌상 확인된 최초의 인물이므로 홍보를 시조로 내세워야 하는 것은 변경할 수 없는 사실인데 홍보의 직위가 너무 낮은 것이다. 종7품의 군기 주부가 자신들의 시조가 되면 가문의 체면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의 많은 성씨 중에 시조가 관직이 높지 않는 곳이 있는가? 그래서 부득이 하게 중대광이라는 관직을 갖다 부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둘째 이유로는 홍보의 아들 겸의 직위가 위위 주부령 동정으로 역시 군사와 관계된 하위 관직이라는 데 있다. 만약 홍보의 관직이 중대광이었다면 고려같은 문벌 사회에서 그의 아들이 이렇게 낮은 벼슬을 할리가 있겠는가?

      고려말까지 번성하던 홍보의 가문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홍보의 후손들은 강제적이든 자의에 의해서든 간에 조선이 들어서면서 모두 관직을 잃고 울진에 다시 모이게 된며 이후 조선 500년 동안 그들은 영양, 울진, 청송 등에서 조용히 시골 사람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게된다. 의령파가 남재(南在)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면서 번성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영양파의 발전,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 녹사공파(錄事公派)

        계보(係譜)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경(承敬), 의(山+頭), 계문(啓文)으로 이어져 계문이 시조가 된다. 승경의 관직은 영경전 녹사(令慶殿 錄事)인데 영경전은 궁궐 이름인 것같고 녹사는 8품내지 9품의 관리를 말한다. 의는 진사이며 그의 묘가 예천에 있는 것으로 봐서 그는 개성에서 예천으로 내려가 수령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계문의 관직은 진무 부위(振武 副尉)인데 부위란 하급 무관직인데 예천에서 역시 수령 노릇을 한 모양이다. 계문은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는 해에 관직을 버리고 예천 행솔리(杏率里)에서 울진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후 녹사공파는 울진에서 조용히 오늘에 이른다.

      • 만호공파(萬戶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承顧), 영번(永蕃), 호(顥)로 이어져 호가 시조가 된다. 승고의 관직은 중정대부 종부시령 판사(中正大夫 宗簿寺令 判事)인데 중정대부란 종3품의 계급을 말하고 종부시란 왕족을 기록하고 그들의 족보를 만드는 관청이며 판사란 그 관청의 장을 말한다. 영번의 관직은 신호위 보승 중랑장인데(神虎衛 保勝 中郞將)인데 신호위 보승이란 군부대이름이며 중랑장은 정5품 무관이다. 영번 역시 고려가 망하자 고향 울진으로 되돌아 갔다. 이로서 그의 후손들은 근세까지 중앙과 인연을 끊게된다.

        만호공이라는 말의 유래는 호가 세종때 울릉도를 정벌하였는데 공을 세운 대가로 장군만호(將軍萬戶)라는 관직을 받게되므로서 유래한다. 만호는 종4품의 무관직이다. 아마 울릉도 정벌에 울진에 사는 남씨 씨족대표로서 받은 관직인 것같다. 그러나 만호공파는 이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993년 계유보에 나오는 살아있는 만호공파 남자의 총 인구수는 약 160명 내외가 된다. 격암 남사고는 호의 증손자로서 홍보의 11세손이나 사고의 가계는 사고의 아들대에서 끊어졌다가 1794년 정조(正祖) 18년에 출생한 21세(世) 명옥(命玉)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호공파는 울진에 살고 있다.

      • 현감공파(縣監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 영번, 의(臣+頁)로 이어져 의가 시조가 된다. 의는 정읍현감을 했었다. 그래서 이 파를 현감공파라 하는 것같다. 이들은 울진, 경주 보문(慶州 普門), 봉화 대현(奉化 大峴), 평해 방율(平海 芳栗) 등에 살고 있다.

      • 반송공파( 松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 영번, 영(領)으로 이어져 영이 시조가 된다. 이들의 살아있는 총 남자 인구수는 1993년 계유보에 의하면 남자가 약 50명 내외가 된다. 반송공파에서는 18세(世) 때 남자가 한 명뿐이다. 이 사람의 이름은 계적(啓迪)이다. 이들은 울진천(蔚珍川) 앞과 울릉도(鬱陵島)에 몇 명이 살고 있다. 사람이 살면서 그의 자손이 항상 번성하는 것만은 아님을 본다. 이 파의 현 종인을 보면 1950년 내지 1960년에 태어난 남자들 중에서 그들의 배우자와 자식이 기재되어 있지 않는 것이 많다. 종인들 간에 연락이 끊겼기 때문일 것이다. 반송공파가 바람앞의 촛불같음을 느낌다.

      • 송정공파(松亭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혁, 승고, 영번, 수(須)로 이어져 수가 시조가 된다. 1993년 계유보의 책장 비율을 대충 세어보면 송정공파가 영양파에서 80% 정도이다.

        수의 묘지(墓誌)에 있는 글이 재미있어 전문을 번역해 보면

        감찰(관직명) 영양 남수의 묘지
        監察 英陽 南須 墓誌

        감찰공 남씨의 이름은 수이고 자는 000이며 헌 거사요 영해 영양인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양은 영해부에 속해었다.)
        監察公 南氏 名 須 字 000(3자 결) 軒居士 寧海 英陽人也

        아버지는 중랑장(관직이름) 영번이고 할아버지는 판종부사(관직이름) 승고이며 증조 할아버지는 진사 혁이며 어머니는 전직(궁궐을 지키는 사람) 강릉 유의인 최씨의 딸이다.
        父 永蕃 中郞將 大父 承顧 判宗簿事 曾大父 奕 進士 母 崔氏 殿直 江陵 有 之女

        공은 1395년(태조 4년) 9월 19일에 태어났고, 1417년(태종17년)에 문선에 오르고(문선은 관리를 뽑고 임명하는 것을 말한다. 문선에 오른다는 것은 관리의 예비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다는 뜻이다), 1420년(세종 2년)에 대흥(성씨의 본을 말함) 백 승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서 3남1녀를 두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진이요 관직이 별시(군부대의 이름인 것같음)의 사직(정5품 무관)이고 둘째의 이름은 손이요 무과에 00 하고 셋째의 이름은 전이요 진사이며 따님은 세도있는 가문의 사람이고 문과에 급제하고 현감을 지낸 윤 긍에게 시집을 갔다.
        公 生於洪武 乙亥 九月十九日, 永樂丁酉 中 文選, 庚子 000 娶 大興白昇女, 生 三男一女 一曰 ' +辰' 別侍司直 二曰 蓀 武科 00 三曰 筌 進士 女 適 世家子 文科 行縣監 尹兢)

        친손자들와 외손자들에 관한 자세한 것은 백씨(수의 부인을 말함)의 묘를 자세히 있으니 여기서는 적지 않는다.
        內外兒孫 詳見 白氏墓誌 今不 錄

        1425년(세종 7년) 다방(궁중에서 약을 지어 받치던 관청)에서 처음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아버지 상을 당했다.
        洪熙 乙巳 筮仕 茶方 十月 服斬衰 (서사: 처음으로 관직에 오름, 참최는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입는 옷)

        1428년 (세종 10년)에 관직에 복직했고, 1432년(세종 14년)에 사선(임금의 식사를 만드는 관청)의 식의(정9품)로 자리를 옮겼고, 1434년(세종 16년)에 직장(종7품, 관청의 하급관리의 계급은 참봉, 봉사, 직장, 주부 순이다)으로 승진했고 1435년(세종 17년) 계선0의 주부로 승진했고, 1436년(세종 18년)에 상을 당했고 (그래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438년(세종 20년)에 통례문(의식을 관장하는 관청)에 복직했고, 00에 통찬(나라 제사 때 제사를 진행시키는 관직)으로 승진했고, 1440년(세종 22년)에는 승훈(정6품)으로 승진했고, 1441년(세종 23년)에는 판관(종5품)으로 승진했고, 1442년(세종 24년) 창사로 자리를 옮겼고, 1443년(세종 25년) 9월 큰 꾸지람을 받고 통례문의 통찬으로 되돌아갔으며 이때 계급은 승훈으로 낮아졌고, 1444년(세종 26년) 사헌부의 감찰(정6품)로 옮김에 0으로 공이 수망(관직의 후보자로 추천되는 세 사람 중의 첫째 사람)이었다.
        宣德 戊申 還仕, 壬子 遷 司膳 食醫, 甲寅 升 直長, 乙卯 階宣0 升 主簿, 正統 丙辰 服 齊衰(주: 상복의 일종), 戊午 還 通禮門, 00 己卯 升 通贊, 庚申 升 承訓, 辛酉 升 判官, 壬戊 遷 倉使, 癸亥 九月 以大呵 還通贊 階承訓, 甲子 遷 監察 知司憲0 公 首望

        그 해 9월에 용담(전라도에 있는 현)의 수령으로 나가 오로지 아래 사람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리니 읍 사람들이 그를 칭송했다.
        是年 九月 出守 龍潭, 一以撫字 爲心 邑人稱之 (무자:아래 사람을 어루만져 사랑함)

        1445, 1446, 1447년(세종 27, 28, 29년)에 그 해의 조선 최고수령이 되었다.
        00 乙丑 丙寅 丁卯間 海居 最目

        1448년(세종 30년) 봄에 남솔(원이 제한된 수 이상의 가족을 데리고 옴)로 인해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30년을 스스로 즐기다가 1477년(성종 8년)에 병으로 인해 죽으니 향년 83세였다.
        戊辰 春0濫率0公公0 以溪山 自娛 凡三十年 成化丁酉 以病 卒于0(享으로 추측됨)年八十三

        그해 12월 12일 을사일에 영해 남면(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칠성리) 화전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是年 十二月 十二日 乙巳 于寧海 南面 花田山麓

        수는 아주 꼼꼼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적혀있는 이런 세세한 내용은 본인이 기록해두지 않으면 남이 알기는 어려운 사실들이다. 수는 관직운이 그리 크게 따르지 않았던 것같다. 문선에는 그가 23세 되던 해에 올라갔으나 관리로 채용이 된 것은 5년이 지난 28 살때부터이고 이후 주변부서에서 말단관직으로 시작해 차근차근 올라가 46살 되던 해에 정5품까지 올랐으나 무슨 실수를 했는지 강등되게된다. 이때 수의 충격은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수가 관직생활에서 날짜의 달까지 기록한 것은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와 이때 그리고 현감으로 나가게 되는 해 세 곳뿐이다. 이후 수는 명예퇴직의 수순을 밝게 되는 것같다. 각 부서에서 근무한 연수를 차례대로 보면 다방에서는 5년, 사선에서는 4년, 통례문에서 4년인데 창사에서는 1년만에 쫓겨나 통례문에서 대기발령을 받다가 그의 관직생활의 명예를 높여주기 위해 사헌부 감찰(감찰은 정6품이지만 실세로서 명성이 높은 직위이다)로 잠시 감투를 쒸워준 이후 그가 실수를 한지 꼭 만 1년만에 어느 시골의 현감으로 내보낸 후 현감의 일회 임기가 만료되자(현감의 임기는 30-60 개월이다) 명예퇴직을 시킨 모양이다. 이때 수의 나이는 53세 관직에 첫 발을 내디딘지 25년되던 해이다. 쫓겨가는 수의 변명이 우습다. 수는 남솔(濫率)로 인해 그만두었다고 적고있는데 남솔이란 고을에 부임하는 수령이 그가 데려올 수 있는 식구를 초과하는 것을 말한다. 수의 아들은 3이고 그의 부모는 이미 다 죽었으니 그 당시로 봐서 결코 가족수가 많은 것은 아닐뿐더러 가족이 많으면 데리고 오지 않으면 될것이지 한참 일할 나이에 관직을 그만두고 이후 30년 동안 무직으로 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하튼 지금 종인들은 수를 부를 때 감찰 영양남공 수라한다. 수는 영양읍에서 이후의 여생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그의 후손 12세 계조(繼曺)가 임진난을 피해 청송(靑松)으로 들어와서 청송파의 시조가 된다. 수의 초기 자손들 중에는 관직에 오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후손들은 영양, 울진, 청송, 영해 등에 조용히 살게 된다.

      • 수사공파(水使公派)

        계보는 홍보, 겸, 숙손, 지탁, 삼기(三起), 봉우(鳳羽), 득량(得良), 희(禧)가 되며 희가 시조이다. 삼기는 진사이고 봉우는 문현감(文縣監)이며 득량은 수륙 병마절도사(水陸 兵馬節度使, 종2품이며 각 도의 군사를 통솔하는 무관)이며 희는 진사이다. 봉우 때 울진에서 경주(慶州)로 진출한 것으로 보이며 후손 일부는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으로 진출해서 현재 경주, 강원도 고성, 강원도 한성( 城)에 역시 조용히 살고 있다.




    2. 안동파, 의령파, 고성파

      이들의 기원, 발전, 현상황에 대해서는 필자에게 자료가 없어 무어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군보가 왕명의 출납, 궁궐경호 등을 하는 실세부서인 추밀원에 근무한 것과 군보의 손자 의령파 천노(天老)가 고려 제일의 문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오른 것을 봐서 의령파는 고려조에서도 상당히 번창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조에서도 재(南在)가 이성계에 협력하므로서 번성의 길을 걷게된다. 의령파 중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든 유명한 사람은 곤, 효온, 구만, 이 등이 있다. 남씨들 중 지금(1998년)까지 유명한 사람은 모두가 의령파라 하면 십중팔구 맞을 것이다. 안동파는 안동부근에 살고 있을 것으로 짐작되며 고성파는 사람수가 얼마되지 않는다.




  4. 맺음말

    문헌상에 남아있는 남씨의 조상은 1150년 정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이후 영양파는 고려의 몰락과 함께 몰락하여 현재까지 영양, 울진, 청송, 경주 등 경상북도 동쪽지방에 조용히 살고 있다.

    족보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역할은 거의 하지 못했고 큰 해악을 끼쳤다. 조선 500년 굴곡(屈曲)과 굴종(屈從)의 역사에 족보가 담당한 역할이 상당히 클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를 망치고 있는 권위주의(權威主義)와 존관천민(尊官賤民)의 풍토에도 족보의 역할이 작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국의 아름다운 강산을 좀먹고 있는 숱한 묘들과 살아있는 힘없는 자를 위해 써야할 돈이 아낌없이 들어간 번쩍이는 비석과 묘지를 볼 때 필자는 조상의 어리석음을 통탄한다. 우리 나라를 nova Egypt 로 만들고 있는 이런 한심한 작태는 중지되어야 한다. 족보에서 부계 혈통만을 가지고 친족이라 하는것도 과학적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x 개의 성씨가 각 성씨마다 남녀 한 명씩 2x 명이 있고 유교에서 말하는 동성끼리의 혼인이 금지되어 있는 제도하에서 각 부부당 남녀 1명식의 자식을 낳는다면 n 세대가 지나면 A 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맨처음 조상의 피를 얼마나 가지고있을까? 계산해 보면 대략적으로 n 세대에서는 다른 사람의 피보다 1/2n 정도 처음 조상의 피가 그 후손에게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n = 2 인 사촌인 경우는 25%, n = 3 인 8촌인 경우는 13%, n = 4 인 16촌인 경우는 6%, n = 5 인 32촌인 경우는 3%에 불과하다. 8촌 이상 넘어가면 혈연(血然)적 유사성은 거의 없음을 볼 수 있다. 족보는 없어져야 한다. 도대체 수십대 위 부계 조상이 같은 사람이 나와 성씨가 다른 사람과 나에게 어떻게 다른가? 족보는 폐지되어야 하고 가보(家譜)가 족보를 대신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다르고 인간이 무엇인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관점의 하나로 나의 생물학적 기원을 생각해보는 데서 자신의 조상을 연구하는 현대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조상이 큰 공명(功名)을 떨치지도 않았고 큰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산골에서 묵묵히 조용히 살아왔다는 데서 추호의 자격지심(自激之心)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러한 삶이 지금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인민을 착취하지 않고 제 땀을 흘려서 스스로 산 정직한 삶인 것이기 때문이요 우리 조상은 한 때라는 식의 헛된 공명(功名)이야말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인간은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그가 무엇이냐에 의해 판단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2000년을 얼마 남겨두지 않는 지금이 아마 남씨의 족보에 살아있는 자의 수가 가장 많이 올라와 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한 남자당 최소한 두 명을 낳아야 이중 한 명이 남자가 되어서 현재의 인원이 유지가 되는데 요즘은 아이를 한 명 내지 두 명 정도만 낳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현대와 미래는 씨족의 의미가 상실되기 때문에 씨족간의 연락이 끊겨지고 족보의 간행도 얼마 후면 중지가 될 것이다. 족보는 더 이상 간행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간행되어서도 아니되지만 만일 후에 족보가 또 간행다면 족보의 관직위주의 기록도 이제는 일소(一掃)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를 망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인 권위주의에 족보의 이러한 면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고 현대사회에서 관직은 과거와는 의미기 판이하게 달라졌기때문이다.


  5. 참고 문헌

    • 남씨 기미 대동보(南氏 巳未 大同 譜), 1979
    • 남씨 계유 대동보(南氏 癸酉 大同 譜), 1993